John Dominic Crossan의 「역사적 예수」는 1991년 10월에 Haper Sanfrancisco 출판사에서 출판하였으며 ‘지중해 지역의 한 유대인 농부의 생애’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미국과 캐나다에서 새로운 예수 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는 많은 기독교인들과 교회들, 심지어 교단들이 역사적 예수 연구를 부정적이며 파괴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다른 많은 기독교인들은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자신들의 신앙이 활력을 띠게 되었고 해방되는 기쁨을 경험하며 머리와 가슴 모두를 통해 하느님을 예배하는 일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체험했다고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John Dominic Crossan은 로마의 교황청 성서 연구소 졸업생으로 예전에 신부이었다가 결혼한 사람으로 시카고 드폴대학교의 성서학부 명예교수이며 미국 종교학의 역사적 예수 연구분과 위원장으로서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이며, 로버트 펑크박사와 함께 「예수 세미나」의 공동대표를 맞고 있으며, 그의 저술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In Parables: The Challenge of the Historical Jesus(Harper & Row 1973),
In Fragments(Harper & Row 1983)
Four Other Gospels(Winstone Press 1985)
The Cross that Spoke(Harper & Row 1988)
The Historical Jesus(Harper San Francisco 1993)
In Parables : The Challenge of the Historical Jesus(Polebridge Press 1994)
Jesus: A Revolutionary Biography(Harper San Francisco 1995)
Who Killed Jesus?(Harper San Francisco 1996)
The Essential Jesus(Book Sales 1998)
The Birth of Christianity(Harper San Francisco 1999)
The Jesus Controversy : Perspectives in Conflict(Trinity Pr Intl 1999)
Who Is Jesus?(Westminster John Knox 1999)
A Long Way from Tipperary : What a Former Monk Discovered in His Search for the Truth(Harper SanFrancisco 2000)
Excavating Jesus: Beneath the Stones, Behind the Texts(Harper San Francisco 2001)
그 동안 예수에 관한 연구는 주로 네 가지 관점에서 연구되어 왔는데, 첫째 묵시 예언자로서의 예수로 바이쓰와 슈바이처 이후 불트만과 도드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예수 연구의 잠정적인 결론으로 받아 들여져온 입장이다. 현재 대부분의 유럽학자들의 입장이기도 하다. 최근 묵시 예언자의 사회 개혁적 비전을 고려하여 예수의 사회개혁가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학자도 있는데, 홀스리와 맥코비 그리고 타이센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지혜 선생으로서의 예수로 예수세미나를 중심으로 적극 수용되어진 이론이다. 특히 Q문서와 도마복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전승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 예수의 교사적 이미지를 강조하며, 헬라 견유철학자 또는 유대 랍비의 이미지로 예수를 묘사한다. 셋째 신화로써의 예수로 이는 역사학이 교리화된 예수론에 대해 도전하기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는 입장으로 성서학자 보다는 종교학 및 고전학자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들은 극단적으로 아예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의 실존성에 의심을 던지며, 유대 메시야 사상 혹은 고대 신화적, 철학적 세계관의 투영으로 예수라는 신화적 인물이 창조되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로 기존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이다. 예수의 제자들과 기독교인들은 예수 부활 사건을 경험한 이후 예수를 그리스도요 구세주로 고백했으며, 신약성서는 신앙의 대상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역사적 예수상도 교회 신앙 대상인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의 이미지를 바꿀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John Dominic Crossan은 예수연구의 제학문적 방법론을 제공한 학자이다. 그는 문화-인류학, 그리스-로마 역사, 그리고 유대역사, 문서비평, 본문비평 등 다양한 학문방법론을 총동원해 예수의 역사적 모습을 구성한다. 완전한 실제 예수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지만, 이런 방법으로 가장 근접한 책임 있는 예수이해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서와 초기 기독교 문서를 시대별로 네 단계로 구분한다. 첫 단계는 30-60년, 둘째단계는 60-80년, 셋째단계는 80-120년, 넷째단계는 120-150년이다. 가장 오래된 문서 층을 통해 역사적 예수에게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는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 이야기의 다양한 발전단계를 추론해 낸다. 그가 분류한 문서단계가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만약 그 전제가 받아들여 진 이후라면 그의 방법은 효과적으로 복음서의 문서전승사를 추론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고 본다. 크로싼에 의하면, 예수는 그의 멘토 세례 요한과 다른 길을 선택했다. 요한이 묵시적 예언자였다면, 예수는 세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예수는 하층 촌부였다. 사회에서 낙오된 자들에 대한 그의 연민은 실제 그들의 삶을 살아간 예수의 삶의 정황에서 나온 것이다. 당대 로마의 식민주의에 짖눌린 사회의 혼란 속에서 그는 겨자씨 같이 작지만 왕성한 생명력을 가진 하층 민중들과 어울리며 식탁교제를 나누었다. 그는 철저히 기존 사회의 계급구조에 저항하는 철저한 평등주의를 주장했다. 예수는 과격 저항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윗의 언약이 실현되기를 고대하는 이상주의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는 대중 연설자로 마치 헬라의 견유 철학자처럼 거리와 시장에서 사람의 영혼을 깨워 세상을 새롭게 보도록 촉구하는 몸소 행동하는 선생이었다.
본 서는 ‘지중해 지역의 한 유대인 농부의 생애’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총 3부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전주와 서문은 예수의 복음과 역사적 예수에 대해 간략히 말하고 있으며, 제1부는 브로커들의 제국으로 1장부터 4장까지가 여기에 속하며, 당시와 현재, 전쟁과 평화, 노예와 후견인 그리고 가난과 자유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제2부는 브로커 체제와의 싸움으로 5장부터 10장까지가 여기에 속하며, 귀족출신의 역사가, 비전을 보는 이와 교사, 농민들의 저항, 주술사 및 예언자, 의적(義賊)과 메시아 그리고 반란자와 혁명가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제3부는 브로커 없는 나라로 11장부터 15장까지가 여기에 속하며 세례 요한과 예수, 하느님의 나라와 지혜 그리고 주술과 식사, 죽음과 매장 그리고 부활과 권위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후기로 예수와 유대교, 유대인 농민 견유철학자, 예수와 기독교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전주: 예수의 복음
태초에 퍼포먼스가 있었다. 말만 있었던 것이 아니며, 행동만 있었던 것도 아니라, 둘 모두가 서로에게 영원한 자국을 남기며 있었다. 그가 갈릴리 저지대 마을에 들어설 때, 그는 아직 낯선 사람이다. 오랜 세월 겨우 끼니만 이어갈 수밖에 없어 가난과 극빈 사이의 경계선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농부들은 냉정하고 무뚝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가 하느님의 통치에 관해 말하자,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호기심에 끌려 그의 말을 듣는다. 그들 모두는 통치와 권력, 왕국과 제국에 관해 알고 있지만 그들이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세금과 빚, 영양실조와 질병, 농민에 대한 억압과 악마 같은 재산이라는 관점에서 알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이 실제로 알고 싶은 것은 이 하느님의 왕국이 절름발이 아이에 대해, 눈먼 부모에 대해, 그리고 마을 어귀의 묘지에서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미친 사람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으며 그가 세례를 받은 요단강은 단순한 강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제국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민족적 자유에 이르는 고대의 원형적 이행을 반복하는 것이다. 헤롯 안티파스는 신속하게 세례요한을 처형했지만 묵시종말론적 성취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예수는 자신의 고유한 음성을 듣고 임박한 묵시종말의 하느님이 아니라, 현재적 치유의 하느님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말하기를 너희들은 치유받은 치유자들(healed healers)이기 때문에 그 나라를 다른 사람들에게 주라고 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나라의 후견인이 아니며 너희들도 그 나라의 브로커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나라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언제나 그 나라를 원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얻을 수 있다.
이처럼 황홀한 비전과 사회적 프로그램은 사회를 그 풀뿌리에서부터 위를 향하여 재건하여 했는데, 이것은 종교적 및 경제적 평등주의의 원칙에 기초한 것으로서, 농부들의 집에서 직접 공짜로 치유하고 그들이 내어놓은 것을 공짜로 나누는 원칙이었다. 이것은 위계질서를 만들고 차별을 유지하려는 문명의 영원한 성향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정치적 혁명을 초래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사회적 혁명을 그리고 있었다.
예수의 말씀들은 읽어야 할 목록이 아니며 심지어 선포해야 할 설교도 아니다. 그것은 연주되어야 할 악보이며 실천되어야 할 프로그램이다. 이 책은 그 첫 번째 연주와 퍼포먼스의 기록이다. 마지막에는 처음처럼, 지금도 그 때처럼, 단지 퍼포먼스만 있을 따름이다.
서문: 역사적 예수
“실제 예수를 찾으려는 것은 원자물리학에서 초현미경적인 입자의 위치를 찾아 그 전하(電荷)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 그 입자는 직접 볼 수 없으며, 사진판 위에서 그것을 움직이게 만든 더욱 큰 입자들의 궤적들이 남긴 선들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Morton Smith)
역사적 예수 연구는 역사적 문제들 때문에 수행할 수 없다고 말한 역사가들이 항상 있었다. 또한 신학적 반대 때문에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신학자들도 항상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긍정적인 입장이 나타나고 있으며 수많은 학문적 대가들이 서로 상당히 다양하게 예수의 상을 그려내고 있다. 다니엘 해링톤이 1986년 8월 6일에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가톨릭 성서연구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행한 연설의 개정판에는 최근에 학작들이 제안한 예수에 관한 일곱가지 서로 다른 상(像)을 간단히 묘사하고 있는데 그 차이는 역사적 예수상을 자리매김한 서로 다른 유대적 배경과 관련되어 있는데. 그것은 정치적 혁명가로서의 예수(S. G. F. Brandon, 1967), 주술사로서의 예수(Morton Smith, 1978), 갈릴리의 카리스마적 인물로서의 예수(Geza Vermes, 1981, 1984), 갈릴리의 랍비로서의 예수(Bruce Chilton, 1984), 힐렐 학파 혹은 최초의 바리새파로서의 예수(Harvey Falk, 1985), 에세네파 예수(Harvey Falk, 1985) 그리고 종말론적 예언자로서의 예수(E. P. Sanders, 1985)이다. 이런 목록의 모든 저술이 똑같이 설득력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이처럼 여러 예수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문제를 드러내기에는 충분이다.
예수 연구를 위한 나의 방법론은 세 가지의 3중 구조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싸움, 전술, 전략이다. 처음 3중 구조는 교차문화적이며 통시적인 사회인류학(cross-cultural and cross-temporal social anthropology)을 이용한 거시적 차원과, 헬레니즘 혹은 그리스-로마의 역사(Hellenistic or Greco-Roman history)를 이용한 중간적 차원, 그리고 예수에 관한 특정한 말씀과 행적, 이야기, 일화, 고백과 해석의 문헌(literature)을 이용한 미시적 치원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이 세 가지 차원은 모두 효과적인 종합을 위해 동등하게 협조해야만 한다. 지난 200년 동안 복음서들에 대한 비교 연구는 확실한 결론은 내렸다. 예수 전승은 세 개의 중요한 층(layers)을 지니고 있는데, 첫째는 기억된 것(retention)의 층으로서 말씀과 행적, 사건들의 적어도 그 핵심을 기록한 것이며, 둘째는 발전시킨 것(development)의 층으로서 핵심자료들을 새로운 상황, 문제, 예상치 못한 경우들에 적용시킨 것들이며, 셋째는 창작한(creation) 층으로서 새로운 말씀들과 이야기들을 작성한 것뿐 아니라 보다 큰 이야기의 단락(complex)을 작성함으로써 이 과정에 의해 그 내용이 바뀌게 된 층이다. 나는 이 세 개의 층을 원래의(original) 층, 발전시킨(developmental) 층, 작성한(compositional) 층이라고 부르거나 아니면 기억의 층, 발전시킨 층, 창작한 층이라고 부르지만 나중 두 개의 층이 형성된 과정에 대해 경멸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걸대로 거부한다. 예수가 뒤에 남긴 사람들은 암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들이며, 암송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이며, 앵무새가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예수 연구를 위한 방법론의 두 번째 3중 구조는 예수 전승 자체의 성격에서 비롯된 본문상의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첫 단계는 예수 전승의 자료목록 조사(inventory)이며, 둘째 단계는 그 전승층을 구분하는 작업(stratification)으로서, 각각의 자료나 본문을 연대상의 순서에 따라 배열하여 독자들이 C.E(Common Era) 30년부터 60년 사이, 60년부터 80년 사이, 80년부터 120년 t이, 120년부터 150년 사이의 전승층에 속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다. 셋째 단계는, 예수 전승이 기록되어 있는 출처를 밝히는 일(attestation)일로 그 전승층에 따라 구분된 기초자료들을 그 자료나 본문 속의 각각의 단락들에 대한 독립적 출처들이 몇 개나 되는지를 밝히는 작업이다.
예수 연구를 위한 방법론의 마지막 3중 구조는 이미 연대기적 전승층과 번호를 매긴 출처에 따라 확립된 자료목록의 방법론적 조작에 초점을 맟춘다. 이 세 요소 가운데 첫째는 전승층의 순서(sequence of strata)에 초점을 맞춘다. 이 작업은 첫 번째 전승층에서 시작하여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전승층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둘째 요소는 예수 전승이 기록되어 있는 출처의 많고 적음에 따라 그 순위를 매기는 작업(hierarchy of attestation)이다. 나의 방법론은 첫 번째 전승층에서부터 시작하며, 그 중에서도 독립적 출처들이 가장 많은 단락에서부터 시작한다. 마지막 요소는 예수 전승 가운데서 기록된 출처가 한 군데 밖에 없는 단수 출처 전승들을 괄호 속에 넣는 작업(bracketing of singularity)이다. 이것은 심지어 첫 번째 전승층에 들어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단 한 군데밖에는 기록되지 않은 단락들을 모두 괄호 속에 넣어, 고려 대상에서 제쳐두는 작업이다.
제1부 브로커들의 제국
제1장 당시와 현재
고대로부터 우리에게 말하는 목소리는 거의 모두 소수의 문화적인 엘리트들의 목소리이다. 즉 고대 세계의 95%에 달하는 소리없는 민중들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Thomas F. Carney). C.E. 1세기는 세 개의 거대한 필터들 때문에 오늘날 그 모습을 분명하게 보기 어렵다. 즉 과거는 거의 전적으로 남성 엘리트들에 의해, 또한 부자와 권력자들의 관점에 의해, 또한 박식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에 비전에 의해 기록되었다. 이런 세 가지 필터를 통해, 또한 2천년의 간격을 뛰어 넘어 어떻게 지중해 지역의 유대인 농부의 얼굴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 세 가지 필터에 맞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세 가지 중요한 자료들이 있는데, 첫째는 거시적 차원에서, 인류학적 혹은 사회학적 연구들과 모델들이 있는데, 특히 통시적이며 교차문화적인 방법론을 사용한 것들이 도움이 된다. 둘째로 중간적이며 보다 지역적 차원에서, 고고학적 발굴과 발견들이 도움이 된다. 셋째로 미시적 차원에서, 주로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문서들과 서고들, 증거 서류들이 있는데, 대개 농민들은 문맹과 가난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지만, 이 문서들 속에서 평범한 농민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러나 지중해 유역의 사회 및 문화인류학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그 첫째 단계는 인류학적 탐구에 개방되어 있는, 타당한 범(汎) 지중해적 사회상을 설정할 것과 둘째 단계는 특정 지역의 현장조사(fieldwork)를 하도록 훈련받은 인류학 연구자들에게는 더욱 어렵기 때문에 지중해 지역의 인류학적 구도 안에서 분석적으로 비교 사회학과 비교 문화인류학을 전개하는 것이 다음 단계가 요구하는 것이다. 셋째 단계는 이처럼 현대 지중해 지역의 (사회인류학적) 상수들을 고대 지중해 세계에 투영시키는 것을 비판적으로 통제하는 작업인데,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과거 당시에로 이동하는 일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하는 현장 조사로부터 도서관에서 문서들을 뒤지는 작업으로 이동하는 일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작업은 흔히 고대 역사로부터 현대 인류학으로 이동하면서 진행되었지, 그 역방향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지중해 지역의 인류학에 대한 1977년의 동향 보고서에서 존 데이비스는 “지중해 지역에서 관찰된 세 가지의 중요한 계층형태는 관료제, 계급 그리고 명예이다. 이 세 가지는 가각 재산의 분배와 어느 정도 직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명예의 반대인 수치는 특히 그 다툼의 원인이 여자일 경우에 중요하며, 여자의 처신은 사회적 집단의 명예를 규정한다. 모든 이데올로기들과 마찬가지로, 명예와 수치는 사회 안에서 권력의 분배와 질서의 창출을 위한 제도적 조치들을 보완한다.
2장 전쟁과 평화
로마와 아우구스트의 평화는 로마와 이탈리아인들의 평화였으며로마와 이탈리아 내전을 통한 평화였다. 전쟁이 이탈리아 이외의 어떤 지방들을 초토화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평화로 인해 그들이 혜택을 입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평화는 모든 세상이 풍작으로 흥겨워하는 평화와는 매우 멀었고 오히려 동방에 대한 서방의 승리로서의 평화, 끝없이 전쟁에 시달리는 주변부에 대한 중심부의 평화였다. 로마와 이탈리아가 배웠던 것을 다른 위대한 제국들 역시 배웠다. 즉, 제국적 중심부는 그 폭력을 다른 지역에 수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법과 질서라고 부르며 심지어 그것을 평화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3장 노예와 후견인
계급은 본질적으로 관계로서, 무엇보다도 집단적인 착취와 물론 그것에 대한 저항하는 사실에 대한 사회적 표현이다. 즉 사회가 경제적 계급으로 나뉘는 것은 그 성격상 착취가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서 유산계급이 무산계급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방식이다. 다른 인간에 대한 절대적 지배권, 다른 사람을 도구나 자신의 정욕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명백한 권리는 양쪽 모두를 비인간화시킨다. 이것이 노예제도가 뜻하는 것이며 어떤 형태의 노예제도이건 마찬가지이다. 노예제도는 하나의 제도로서 후견인 체제(patronage)를 완벽하게 보완한다. 이 두 가지 제도는 함께 고대 사회의 권위주의와 계층구조를 설명해 준다.
인간 후견인과 불멸의 후견인 사이의 연결, 즉 정치적 의뢰인과 종교적 의뢰인 사이의 연결은 오늘날의 현실로부터 고대 지중해 지역의 현실에까지 가 닿는다. 제레미 보이스봐인은 오늘날의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차이를 설명하면서 후자에 대해 “특히 정치적 영역에서 중재자의 중요성은 시실리아인들과 말타인들이 흔히 인용하는 속담, 즉 ‘성인의 도움이 없이는 당신이 천당에 갈 수 없다’는 속담에 잘 드러나 있는데, 두 문화 모두에서 정치적 후견인은 성인으로 지칭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성인들이 후견이라 불렸지만 지금은 후견인이 성인이라 불린다. 이것은 지상 후견인과 천상의 후견인의 병행(parallelism)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땅에서부터 점차 하늘로 단절없이 올라가는 계층적 후견인 체제의 연쇄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향적 이동은 바바라 레빅이 지적한 것처럼, “로마 제국의 사회에서 유일신 사상(monotheism)이 급속히 확산되도록 만든 성찰을 불러 일으켰다.”
4장 가난과 자유
견유학파(Cynics)는 자유를 통해 행복을 추구했다. 견유학파의 자유 개념에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공포, 분노, 비탄과 기타 감정들로부터의 자유, 종교적 혹은 도덕적 통제로부터의 자유, 시 혹은 국가 혹은 공공관리의 권위로부터의 자유, 대중적 여론에 대한 관심으로부터의 자유, 재물에 대한 신경으로부터의 자유, 지역에 대한 국한, 처자식을 돌보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도 포함되어 있다. 견유학파의 자유 개념은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가난이 자유와 왕권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견유철학의 입장이다. 에픽테투스는 견유철학의 외모가 그 내용에 대한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주의한다. 그러나 심지어 그런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면서도 그는 그 외모를 버릴 것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내적인 가난이 외적인 가난을 낳아야 하며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자유는 욕망과 상실 모두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드는 물리적 가난으로부터 올 뿐 아니라 특히 사람을 공격과 폭행 모두에 대해 잊게 만드는 정신적 가난으로부터 주어진다. 하층계급이 견유철학을 수용하는 한, 그들은 교육을 받은 상층계급으로부터 이중적인 모욕을 당했는데, 하나는 그들의 철학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계급 때문이었다.
제2부 브로커 체제와의 싸움
사회 구조 속에서 그 일부가 구원의 수단에 참여하는 것이 너무 조직적으로 배제되었다고 느낌으로써 현재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여기서 우리는 권력에 대한 접근을 뚫고 나갈 전략을 발견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 전략의 성격은 그 사회의 유형과 박탈감의 형태에 달려 있다. 정치적 혁명, 십자군, 마녀, 천년왕국설 등은 그 가능성의 일부이다. 만일 천년왕국적 활동과 운동이 나타나면, 그것들은 구체적 패턴을 따라 발전하게 마련이다(Sheldon R. Isenberg).
5장 귀족 출신의 역사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C.E. 37년에 예루살렘의 제사장 가문의 귀족층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첫 번째 저작으로 「유대전쟁」(Jewish War)이 있고 다음으로 20권으로 된 「유대고사」(Jewish Antiquities)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아피온에 반대하여」(Against Apion), 혹은 「유대인들의 고사에 관하여」(On the Antiquity of the Jews)라는 두 권으로 된 책이 있다. 요세푸스는 그 나름의 방식대로 언제나 친로마적이었으며 동시에 친유대적이었는데, 그의 이런 태도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을 향한 로마인들의 변증자로 시작하여, 로마인들을 향한 유대인들의 변증자로 끝났다. 그러므로 그의 저작을 읽어내려 가면서, 우리는 특정 기록이 그 변화와 발전의 어느 선상에 있는지는 언제나 주의 깊게 고려해야만 한다. 그의 글에서 우리가 항상 사소한 생략, 추가, 변경, 미묘한 강조, 뉴앙스, 균형을 다루고 있음을 인정할 때 이런 변형들이야말로 요세푸스의 입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6장 비전을 보는 이와 교사
1979년 8월에 웁살라에서 개최된 「묵시사상에 관한 국제학술회의」에서 토드 올슨(Tord Olsson)은 “만일 우리가 사회 인류학 분야와 비교 종교학 분야의 자료들을 고찰한다면, 계시적인 세계관이, 현실적 혹은 상상에 의한 갈등이나 위기 상황, 또는 그런 상황에 대한 불안 속에서, 언제나 실현된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하나의 원인은 중앙 권력에 대한 접근을 포함하여, 사회조직이 그 체제 사이의 의사전달이 감소되어 어떤 집단의 문화적 통합이 위태롭게 될 만큼 감소됨으로써 그 영향을 받게 될 때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또 하나의 원인은 하나의 공동체나 집단의 문화적 통합이 외적인 영향, 예를 들어 전쟁, 식민주의, 정치적 혹은 종교적 선전 등의 외적인 영향을 접하게 될 때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학술회의에서 노만 콘(Norman Cohn)은 중세의 천년왕국설에 대해 발표하면서, “천년왕국운동이란 구원에 대한 환상(phantasy)에 의해 영감을 받은 종교운동으로서, 그 구원이 ①신자들이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 구원을 누리게 된다는 점에서 집단적이며, ②그 구원이 저 세상적인 하늘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지상적이며, ③그 구원이 조만간, 그리고 갑자기 온다는 점에서 임박한 것이며, ④그 구원이 이 땅위에서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음으로서 새로운 시대가 단지 현재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한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것이며, ⑤초자연적인 존재라고 간주되는 대리자들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반(反) 그리스적 묵시사상은 인류학적 천년왕국설이라는 폭넓은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새뮤얼 에디는 종교적 저항에는 상호 얽혀 있는 세 가지 중요한 동기들이 있었는데, 첫째 본국인의 통치를 되찾는 것 자체가 목적인 노력이 있었으며, 둘째 사회적 격변과 경제적 착취를 끝내는 수단으로서 본국인의 통치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있었고, 셋째 법과 종교를 보호하기위해 본국인의 통치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있었다고 말하였다.
저항에는 네 가지 기본적인 형태가 있는데 소극적 저항, 전투적 저항, 메시아적 저항, 그리고 개종시키는 저항이다. 소극적 저항은 모든 반대하는 문화 속에 나타나며 자신들의 가장 오래된 영웅들에 관한 고대 전설로 되돌아가는 형태이며, 전투적 저항은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으며 항상 신적인 존재가 그리스인들을 추방하고 그 땅이 본국민에 의해 정상상태로 회복될 뿐 아니라, 목가적인 풍요와 열광적인 평화를 회복시키는 메시아적 저항과 함께 나타났다. 개종시키는 저항은 페르시아와 팔레스타인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데, 불신자들에게 메시아의 승리를 설득시키거나 심지어 강압적으로 개종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네 가지 형태의 저항은 모두 지배적인 외래문화가 전통문화를 종식시키거나 개조시킬 위험이 있을 때 생겨나는 정상적인 대응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대 묵시사상에 대한 분석에는 세 가지 차원의 배경이 고려되고 있는 셈이다. 거시적 차원은 종교정치적 식민주의라는 특정 형태와 상황에 대한 매우 구체적 대응으로서 천년왕국설을 교차문화적으로 연구하는 차원이다. 중간적 차원은 그리스적 근동지방에서 천년왕국설이 문화적 제국주의를 거절함으로써 생겨난 역사적 환경이다. 미시적 차원은 그리스-로마 시기에 포괄주의와 배타주의라는 긴 스펙트럼 안에서 유대교와 이교도가 상호작용한 차원이다. 여기서 결코 잊어서는 안될 사실은 한편으로 유대인들이 반식민지적 묵시사상에 있어서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들 모두가 심지어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그 천년왕국적 꿈에 동의하거나 동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7장 농민들의 저항
식민지 백성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에 참여하는 것이 거절당하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더 자신들의 문화전통이나 종교전통 속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들의 종교전통들과 의식들은 그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생활의 유일한 차원으로서 그 중요성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그런 상징들이 모독당하는 것에 대해 더욱 예민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Richard Horsley).
R. Horsley는 식민지 상황과 제국적 상황 속에서 ‘폭력의 나선형(a spiral of violence)'의 첫째 단계는 불의(injustice)의 단계로서 이것은 식민주의의 구조적 폭력과 제국주의 자체의 제도적 폭력을 말한다. 둘째 단계는 토착민들의 저항과 항의(protest and resistance)의 단계로서 파업과 시위를 통한 소극적 철수에서부터 약탈과 테러리즘까지 다양한 방식들이 동원된다. 셋째 단계는 억압(repression)의 단계로서, 이것 역시 협박과 투옥, 실종과 고문, 처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마지막 단계는 반란(revolt)으로서 그 이전의 단계가 견딜 수 없는 상태까지 올라갈 때 벌어지는 단계이다.
저자는 이러한 Horsley의 이론에 의존하여 그 대다수 하층계급에 초점을 맞추어 1세기에 로마가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의 민중운동들에 대해 매우 설득력있게 일곱가지의 농민파업을 기술하고 있다.
8장 주술사 및 예언자
새로운 마술운동들은 미정상적인 종교적 대응, 즉 하나의 소종파적 대응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주로 그들의 제의 절차와 조직 형태의 새로움에 기인한다. 이런 운동들은 전통적인 종교적 관행에 대한 항의인 셈인데 그 이유는 이런 운동들이 예전의 방식에 대해 새로운 방식을 사용하며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개념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마술적 신앙은 원시적인 종교적 입장일 뿐 아니라 천년왕국설보다 더욱 끈질긴 것이다. 신자들은 천년왕국설의 원대한 주기적 실패보다 마술의 수많은 작은 실패들로 인해 덜 혼란스러워했으며 더욱 쉽게 설명될 수 있었다(Bryan Wilson).
식민지 백성들의 종교적치적 저항에 대한 브라이언 윌슨의 유형론에는 마술적 혹은 마법적 예언자들뿐 아니라 천년왕국적 혹은 혁명적 예언자들, 간단히 말해서 주술사들과 예언자들도 등장한다. 주술사는 신적인 능력을 현존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 즉 공동체적 제의를 통한 간접적 방식보다는 개인적 기적을 통한 직접적 방식으로 신적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리처드 호슬리는 요세푸스 안에서 세 가지 서로 다른 유형의 예언을 구분하였는데, 주석적 예언, 신탁적 예언, 그리고 천년왕국적 예언이 그것이다. 내가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세 번째 유형에 속하는 예언이다. 천년왕국적 예언의 배경은 인류학적 천년왕국설과 유대교의 묵시사상이 있는데, 신하계급의 서기관적 천년왕국설이 있으며 농민계급의 민중적 천년왕국설이 있다. 전자의 결과는 문서이고 후자의 결과는 행동이었다. 묵시사상은 물론 두 계급 모두에게 똑같이 속해 있지만 각자의 고유한 방식대로 속해 있었으며 모든 신하들과 모든 농민들이 묵시종말적 꿈을 꾸거나 천년왕국적 비전을 지녔던 것은 아니었다. 호슬리는 천년왕국적 예언자들을 세 가지 성격으로 규정하였다. 첫째로 그들은 상당한 단독적인 인물도 아니고 대여섯 명의 제자들을 거느린 예언자들도 아니며 상당한 숫자의 운동(수 백명, 혹은 수 천명)의 지도자이다. 둘째로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나 심판을 단순히 선언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구원의 행동을 주도한다. 셋째로 이러한 구원행동은 새로운 종말론적 행동으로 이해되는데 이런 행동은 유형론적으로 모세와 여호수아가 인도한 위대한 구원행동과 일치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통해 배운다.
9장 의적과 메시아
사회적 의적(義賊)은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사회적 현상 가운데 하나이며, 가장 놀랄만큼 일정한 현상 가운데 하나로서 사회가 농업(목축경제 포함)에 기초하여 있으며, 주로 농민들과 토지를 갖지 못한 노동자들이 다른 누구, 즉 지주, 도시, 정부, 법률가, 혹은 심지어 은행에 의해 지배되고,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사회에서는 어디에서나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세 가지 주요 형태 가운데 어느 하나로 나타나는데, 고상한 비적들, 원시적인 저항적 투사들 혹은 게릴라 부대 그리고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보복자이다.
시위자들과 주술사들은 일차적으로 인간적인 폭력없이 활동한다. 천년왕국적 예언자들이 인간적인 폭력을 기피하는 이유는 그들이 훨씬 더 크고 효과적인 하느님의 폭력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인간적인 폭력을 불러일으키지만 하느님의 폭력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의적들은 일차적으로 인간적 폭력만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그런 폭력이 선제공격이 아니라 대응이라는 점이다.
농민 예언자들이 주도한 비폭력적이며 천년왕국적 운동들은 모세와 여호수아 이야기에 대한 민중적 회상에 기초를 두고 있었으며 농민 메시아들이 주도한 폭력적이며 군사적인 운동들은 사울과 다윗 이야기에 대한 민중적 회상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한편 스스로 메시아임을 자칭한 자들은 B.C.E. 4년 헤롯 대왕이 죽은 다음과 C.E. 66-70년 사이에 두 차례 나타나는데 모두 다섯 명의 자칭 메시아들이 있었다. 전적으로 스스로 메시아라고 지칭했던 사람들은 모두 비천한 계급 출신들로서 이들이 갈릴리와 페레아, 유대 등 여러 곳에서 나타났으며, 이것은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민중적 반란으로 결과적으로 2,000명이나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10장 반란자와 혁명가
Stephen Dyson은 이 책의 후반부에서 집중하고 있는 약 100년 동안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일어난 다섯 차례의 토착적 반란을 비교한 후에 로마에 대항한 토착민들의 반란의 여덟 가지 반복되는 특징들을 제시했다. 첫째, 그 반란은 로마의 일차적 통제가 확립된 다음이지만 그러나 이전의 토착민들의 사회구조가 완전히 변화하기 이전에 일어났다. 둘째, 반란들은 로마제국의 통제가 세금징수 측면에서 혹은 행정적인 측면에서 더욱 심해질 때 일어났다. 셋째, 그 반란들은 모두 예전과 비교하여 부족의 통일을 강화시켰던 토착민 지도자들이 주도했던 반란들이었다. 넷째, 반란들의 핵심적 지도자들은 거의 언제나 좀 더 로마화된 토착민 계급출신들이었다. 다섯째, 그 부족의 통일과정은 경우에 따라 예전의 왕국체제 혹은 보다 최근의 회합 형태들에 의해 도움을 받았다. 여섯째, 그 반란들은 모두 로마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이미 평정 과정이 완료되었다고 믿었을 때 일어났기 때문이다. 일곱째, 대대적인 심리적-종교적 소동이 일어났다는 증거가 있는데 예를 들면, 아르미니우스의 반란 당시에는 체포된 로마의 백부장들과 호민관들을 희생제사로 드렸으며, 보우디카의 반란 당시에는 로마인들과 로마화한 상류계층의 여인들에게 잔학행위를 저질렀다. 여덟째, 비록 그 반란들이 계속된 기간은 서로 달랐지만 베르싱게토릭스의 반란과 보우디카의 반란은 초기에 그 원래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이 패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 처음 지도자들에게 의존했던 것은 아니었다.
제3부 브로커 없는 나라
진정한 역사적 예수가 현대의 예수를 뒤집어엎고, 현대적 정신을 누르고 이 땅 위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분은 선생이 아니었으며, 궤변가도 아니었다. 그분은 심지가 뚜렷한 지배자였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누구인지를 표현해주는 명칭을 발견할 수 없다. 그분은 그 옛날 호숫가에서 그분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찾아가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름이 없는, 알지 못하는 분으로 찾아오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똑같은 말씀을 하시며, 우리 시대에 그분이 성취하셔야 할 과제를 우리에게 정해주신다.
11장 세례요한과 예수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헤롯 안티파스는 C.E. 30년 경 그의 이복형제 헤롯의 아내 헤로디아스와 혼인하기 위해 그의 첫 번째 부인을 버렸고, 그 후 그의 버림받은 장인 아레타스, 즉 나바테야의 왕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루이스 펠드만(Louis Feldman)이 지적한 거처럼, “요한이 처형된 이유에 대해 요세푸스와 복음서들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볼 필요는 없다. 즉 기독교인들은 요한이 통치자에게 던진 도덕적 비난을 강조하였던 반면에, 요세푸스는 그가 헤롯에게 준 정치적 불안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나는 헤롯이 요한을 참수한 마르코 6:14-29의 자세한 이야기는 마르코 자신이 창작한 것으로서 마르코는 이 창작을 통해 요한과 예수의 운명 사이에 병행되는 것이 있음을 강조하고 특히 두 인물 모두 처형된 것이 다른 사람들의 주장에 의해서였으며, 당국자들은 마음내켜 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단락에서 마르코나 야고보의 아포크리폰 6:1-4도 요한의참수에 관한 정치적 측면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이 단락을 통해 우리는 요세푸스의 요한으로부터 예수 전승의 요한으로 넘어가게 된다.
요한에 관한 첫 번째 단락이자 가장 중요한 단락은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주는 단란이다. 이 단락은 일차적 전승층에 속해 있으며 3개의 독립적 출처와 9개의 본문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내가 신학적 손상 통제(theological damege control)라 부르는 것을 많이 갖고 있다. 예수 전승은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주는 것에 대해 매우 불편해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요한이 예수보다 높고, 예수에게 죄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본문은 히브리인 복음서(Gospel of the Hebrews)속에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론 카메론(Ron Cameron)이 요약한 것처럼 예수의 선재(先在), 강림, 세례, 유혹 등의 이야기들이 축약된 신화적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들은 신적인 지혜가 하강하여, 인류의 구원과 계시를 위해 인류의 대표자 속에 구체적으로 화육(化肉)하는 신화를 전제로 한다. 이런 신화는 그리스-로마 세계에 넓게 퍼져 있었으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최초로 기독론을 형성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12장 하느님의 나라와 지혜
거대한 계급 대체가 일어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첫째로 어린이들과 또한 어린이들과 닮은 사람들을 위해, 둘째로 이 세상의 버림받은 자들, 착하지만 겸손한 사람을 소외시키는 사회적 교만의 희생자들을 위해, 셋째로, 이단자들과 분리주의자들, 세리들, 사마리아인들 그리고 두로와 시돈의 이방인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예언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대담한 민중의 보호자들이었는데, 이들은 끊임없이 세도가들에게 맞서서 호령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부자들, 불경스러운, 폭력적인, 사악한” 등의 단어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한, 온순한, 겸손한, 경건한” 등의 단어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밝혔다(Ernest Renan).
“나라”(kingdom)라는 단어는 남성중심적일 뿐 아니라, 적어도 그 역사적 편견을 받아들인다 해도, 역시 일차적으로 지역적인 단어로서 그렇게 해석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그 단어를 통해 실제로 말하는 것은 장소라기보다는 힘과 지배, 나라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또 다른 모호성을 피하기 위해 분명히 밝히자면, 나라(state)란 국가나 제국이 아니라, 생활방식 혹은 존재방식을 뜻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백성들이며, 또한 이상으로서 모든 인간적 지배를 초월하고 심판한다. 우리의 논의의 초점은 왕들이 아니라 지배자들, 국가가 아니라 힘, 장소가 아니라 나라에 있다.
적어도 방법론적 원칙상 제일 먼저 고찰할 것은 하느님의 나라와 어린이들인데 이 단락이 놀랍게도 네 개의 독립적 출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어린이들의 하느님의 나라는 독신자들의 하느님 나라, 겸손한 사람들의 나라, 세례받은 사람들의 나라이다. 또한 예수가 선포한 팔복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극빈자들, 가난이 아니라 거지 신세에 대한 것이다. 예수는 농민들이나 장인 계급의 하느님 나라를 말한 것이 아니라, 불결한 자들, 천민들, 소모계층의 하느님 나라를 말했던 것이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하느님 나라에 대해 기본적으로 네 가지 유형을 상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상상해야만 하게 되었다. 그 네 가지 유형은 주제상으로 묵시종말적 하느님 나라와 지혜의 하느님 나라를 계급 구분, 즉 신하계급과 농민계급의 이해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다. 묵시종말적 하느님 나라는 불의와 억압이 휩쓸고 있는 이 땅 위에 정의와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하느님의 압도적인 행동에 달려있는 미래의 나라이다. 한편 지혜의 하느님 나라는 미래보다는 현재를 바라보며, 지금 여기에서, 이미 혹은 항상 가능한 하느님의 지배 속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지를 상상한다.
13장 주술과 식사
완전한 환상가(visionary)와 신비가(mystic)는자신과 같은 환상가에게만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의 영향은 곧 전해진다. 실천적 지혜의 사람은 이 세상일에만 민첩하며, 단지 머리에만 영향을 미칠 뿐 가슴에는 닿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가슴 깊은 곳에서 회오리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면 결코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없다. 신비적 신앙에 실천적 분별력이 동반될 때만 강력하고 지속적인 결과가 뒤따른다(Joseph Klausner).
주술과 종교의 관계는 의적(義賊)과 정치의 관계와 같다. 즉 의적이 정치권력의 궁극적 합법성에 도전하는 것처럼, 주술은 영적인 권력에 도전한다. 주술과 종교는 고대 세계에서, 혹은 현대 세계에서, 정치적 정의와 규범적 정의상 서로 구분될 수 있지만, 그 실체에 대한 서술적, 혹은 중립적 묘사에서는 구분될 수 없다. 종교는 공식적이며 승인된 주술인 반면에, 주술은 비공식적이며 승인받지 않은 종교이다.
주술에는 악하고 비인간적이며 병적이며 해로운 측면이 있다. 그런 요소들은 종교에도 있으며, 주술과 종교 모두에서 그런 요소들을 지적하고 명시할 필요가 있다. 또한 주술과 종교의 효용성과 효능은 논란이 되어져야 하지만 그 구분은 치료, 치유, 회복과 같은 직접적 결과와 희망, 의미, 위로와 같은 간접적 결과 사이를 구분해야만 한다. 사람의 눈을 속이는 속임수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제의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 이론들, 이데올로기적인 주장, 신학적 체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말하자면 엘리야와 엘리사의 전통을 잇는 1세기의 대중적 유대인 주술사로서 주술적 파피루스를 지녔던 전문적 주술사들과는 달랐을 테지만 그 차이점은 행동을 비교함으로 밝혀져야만 한다.
예수는 귀신 축출자였으며 또한 동시에 치유자였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전은 만일 그런 귀신 축출과 치유가 없었다면 즉각적인 사회적 영향이 없는 황홀한 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치유들은 그 하느님 나라가 정치적 현실의 차원에서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기적들은 어느 것도 하느님 나라와 치유 사이를 연결시키지 않고 있는데 그 연결은 다음에 그 사회적 기능을 분명히 보여주는 틀 속에서 탐구되어야만 한다. 그 논증의 핵심에는 주술과 식사, 기적과 식탁, 자비와 공동식사가 결합된 것으로 세 개의 독립적 자료에 나타나고 있다.
예수가 파견한 선교사들이 자루를 지니고 다니지 않는 것은 그들이 동냥이나 음식이나 옷이나 그밖에 다른 것을 구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적과 하느님 나라를 함께 나누고, 그에 따라 식사와 숙소를 제공받는다. 나는 여기에 원래의 예수 운동의 핵심이 있다고 믿는데, 그것은 영적이며 물질적인 자원들을 함께 나누는 평등주의다.
15장 죽음과 매장
나는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인정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기독교인들이 그런 식으로 꾸며냈을 리는 만무할 뿐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한 두 사람의 비기독교인의 독립적 증언들에 의해서도 확실히 알 수 있는데, 하나는 C.E. 93-94년의 유대인의 증언이며, 또 다른 하나는 C.E. 110년대 혹은 12년대의 로마인의 증언이다.
유대인의 증언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고사」(Jewish Antiquities) 18:63에 기록된 예수에 대한 묘사인데,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그 이전에도 상정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20:200에도 단지 그 사실만 언급하고 있다. 한편 로마인의 증언은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의 증언인데 그는 자신의 「역사」(Histories)에서 플라비우스 왕조의 몰락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 후에, 자신의 「연대기(Annals)에서 율리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해 기록하였다. 앞의 것은 110년대에 기록하였으며, 뒤의 것은 120년대 혹은 130년대에 기록하였다. 그는 C.E. 64년에 로마를 휩쓸었던 화재가 네로 황제의 책임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말한 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소문을 없애기 위해 네로는 대중들이 기도교인들이라고 불렀던 집단을 그 범죄자들로 몰아 가장 잔인하게 처벌하였다. 그 이름의 창시자 크리스투스는 티베리우스 통치 시대에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그 유해한 미신은 잠시 억제되었지만 곧 다시 나타나 그 질병의 근거지였던 유대만이 아니라, 그 수도, 즉 세상의 온갖 끔찍하고 욕된 것들이 모여들어 유행하는 그 수도에도 나타났다”(Tacitus, Annals 15.44; Moore & Jackson 4.282-283).
나의 요점은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의심할 것이 없다는 점이 아니다. 나의 요점은 예수의 수난에 관한 그처럼 구체적인 세부 사실들, 인용된 대화, 이야기의 연결, 그리고 거의 신문기자처럼 시간별로 그 진행 과정을 설명한 것의 출처에 관한 것이다. 즉 그 수난 이야기는 역사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예언에서 비롯된 것인가? 역사를 예언화한 것(prophetization of history)에서 비롯된 것인가, 예언은 역사화한 것(historicization of prophesy)에서 비롯된 것인가?
수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통해 다듬어졌다. 첫째로, 역사적 수난(historical passion)은 최소한의 지식들로 이루어졌는데, 말하자면 요세푸스나 타키투스에 의해 기록된 것과 같이 일반적인 사실들로만 알려져 있었다. 둘째로, 예언적 수난(prophetic passion)은 여러 개의 (구약)성서 구절들이 암시하는 것들로 이루어졌으며 바나바의 서신(Epistle of Barnabas)과 같은 문헌들을 통해 매우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인데, 그 개방된 틀을 중심으로 그 위에, 그 아래, 그 옆에 성서 구절들을 적용시키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마지막으로 이처럼 여러 방향에서 별로 진행시킨 작업들이 하나의 순서를 이루는 이야기 수난(narrative passion)으로 결합되었다. 더 나아가, 나는 이 이야기 수난이 지금은 베드로복음(Gospel of Peter) 속에 삽입되어 있는 십자가 복음(Cross Gospel)으로부터 흘러나온 전승의 한 흐름에 지나지 않으며, 그 흐름은 그 후 마르코복음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그 다음에는 함께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 속으로 흘러들어가, 나중에는 모두 함께 요한복음 속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과 다른 방식으로 수난 이야기의 발전 과정을 재구성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지만, 내 생각에는 이런 방식의 설명이 그 모든 자료들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설명인 것으로 보인다.
내가 주장하는 것처럼, 만일 예수가 체포되자마자 그 추종자들이 도망쳐서, 그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 자체 이외에는 그의 운명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면, 그 공포가 예수가 처형당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심지어 제대로 매장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매장 전승의 궤적은 처음에는 다소 부정적인 시각에서 출발하여 그 원수들에 의한 매장으로부터 그의 친구들에 의한 매장으로 바뀌었으며, 서둘러 엉터리로 매장한 것으로부터 완전한 매장, 심지어 왕처럼 시체에 대한 향료 처리까지 한 매장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첫 번째 문제는 예수가 친구들에 의해 매장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즉 만일 그들이 권력을 가졌다면 그들은 그의 친구가 아니었으며, 만일 그들이 그의 친구들이었다면 그들은 권력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마르코는 또 다시 중요한 예비적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르코는 15장 43절에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즉 “명망 있는 의회 의원이었고 하느님 나라를 열심히 대망하고 있는 사람”을 만들어(예수의 시체를 내어 달라고 요청하도록) 그를 빌라도에게 보냈다. 그는 양편 사이에 꼭 들어맞는 인물로서, 유대 지도층의 “명망 있는” 인물이며 동시에 “(하느님 나라를) 열심히 대망하고 있는” 인물로서 예수와도 연결되었다. 요셉은 이제 빌라도와 예수의 친구가 되었다. 그 통로는요셉으로부터 빌라도로, 다시 안티파스에게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모든 부지런한 편집작업은 하나의 단순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아무도 예수의 시체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몰랐다는 문제이다. 부활절 아침까지 예수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염려했던 사람들은 예수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으며, 반면에 그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군인들조차 그처럼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의 죽음과 시체 처리에 대해 기억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15장 부활과 권위
사람들은 종말론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시대를 위한 그분의 말씀의 중요성을 폐기시키는 일이 될 것이라고 염려하였다. 그래서 그 말씀들 속에서 종말론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요소들을 찾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의 말씀들 속에서 영원한 것은 그것들이 종말론적인 세계관에 기초한 것들이며, 현대 세계의 역사적 및 사회적 상황이 더 이상 간직하지 않고 있는 정신의 표현을 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말씀들은 어느 세계에나 적절한 것인데, 그 이유는 어느 세계에서나 그 말씀들이 감히 도전을 받아들여 그의 세계와 그의 시대를 넘어, 그 말씀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사람을 키우며, 그를 내적으로 자유하게 만들어, 그가 그 자신의 세계와 시대에서, 예수의 권능의 통로가 되기에 적합하도록 만든다(Albert Schweitzer,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1968:402).
자료나 장르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독자들조차도 수난과 매장 이야기들로부터 부활과 현현 이야기들로 옮아가는 것에는 철저한 변화가 있음을 주목할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수난과 매장에 관해서, 빈 무덤을 발견하기까지 하나의 일치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매우 단순하지만, 부활과 현현 전승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딱 잘라 말해서 불가능하다. 나는 수난-부활 전승들을 위한 한 흐름이 십자가복음으로부터 마르코복음으로 흘러들었으며, 그 둘 모두로부터 마태오와 루가 모두 속으로 흘러들었으며, 다시 그 모두로부터 요한 속으로 흘러들었다고 전술했다. 그러나 비록 일반적으로 모든 후대의 판본들이 십자가복음의 수난 순서를 받아들였지만 그들 가운데 아무도 십자가복음의 부활기사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르코가 거절한 이유는 그의 신학이 수난과 파루시아라는 쌍에 기초하였기 때문이다. 부활은 단순히 이제 곧 영광 중에 재림할 예수의 이탈(departure)이었다. 수난과 파루시아 사이가 예수에게 있어서는 부재와 불간섭의 시간이었으며, 그 공동체에 있어서는 믿음 속에 기다리며 그를 본받아 고통을 겪는 시간이었다. 그 기간 중에는 예수가 출현(apparitions)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수난 후에 예수의 출현에 곤해 말하는 것은 마르코 13:5-6과 13:21-22의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그리스도의 똑같은 실수를 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태오, 루가, 심지어 요한조차도 예수가 부활 후에 출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왜 이들 가운데 아무도 십자가복음의 기사, 즉 예수의 부활, 출현, 승천을 결합시킨 기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내 생각에는 그들이 출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요한복음 20:19-29에는 우리가 예수의 출현을 필요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을 말하기 위해 심지어 예수가 승천한 후에도 출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나는 마르코복음의 원래 판본이 15:39에서 로마의 백부장의 고백으로 끝났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들, 즉 15:40-16:8은 마르코의 비밀복음에는 없었던 것으로서, 정경 마르코복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물론 이런 주장이 외적증거나 필사본을 통한 증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주장에 대한 증거는 내적인 증거이며 상황적이며, 임시적이며, 가설적인 것으로서, 논쟁의 여지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결말이 박해와 죽음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소망이 비전, 출현, 심지어 계시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마르코의 신학과 매우 잘 들어맞는다.
후기
역사적 예수는 그 당시의 유대교 안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 책은 역사적 예수에 관한 책이지,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 관한 책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학문적 재구성이다. 독자들이 이 책의 형식상의 방법론과 심지어 그 자료 탐구를 받아들인다면, 재구성할 수 있는 역사적 예수에 관해 서로 다른 해석상의 결론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무시할 수는 없으며, 역사적 예수 탐구를 단순한 재구성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여, 마치 재구성이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전체의 과제를 무효로 만든 것처럼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오직 재구성만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자에게는 하느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본문이 모두 똑같이, 그것이 빨강색, 핑크색, 회색, 검정색이든, A, B, C, D이든, 역사적 재구성의 등급을 매긴 과정이다. 그러므로 만일 독자가 이 재구성을 통해 나타난 것을 믿을 수 없다면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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